한국을 대표하는 공기업 한국전력에서 전기공사를 입찰하는 과정에 10년 동안 구멍이 뚫려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광주지검 특수부(김종범 부장검사)는 낙찰가 등을 알려줘 특정 업체가 공사를 따낼 수 있도록 하고 뒷돈을 받은 혐의(특정범죄 가중 처벌법상 사기·배임수재 등)로 박모(40)씨 등 한전KDN에 파견된 정보통신 업체 직원 4명을 구속 기소했다.

불법 낙찰에 관여하고 돈을 준 업자 2명도 구속 기소됐다.

입찰시스템 서버 조작으로 133건, 2709억원 상당의 공사에서 낙찰업체가 불법적으로 선정됐으며 파견업체 직원들은 그 대가로 134억원을 받았다.

◇ 공사 입찰 어떻게 진행됐나

한전은 각종 전기공사 중 적격심사제 방식에 따른 전자입찰에서 기초금액과 예비가격 범위(±2.5%) 등 기본 사항을 적어 공고한다.

투찰 마감 하루 전 오후 4시께 기초금액의 ±2.5% 범위에서 1365개의 예비가격을 만들어 이 가운데 15개를 임의로 선택, 암호화한 뒤 15개 추첨번호에 하나씩 배정한다.

입찰자는 15개 중 4개의 추첨번호를 선택하고 입찰자가 가장 많이 선택한 추첨번호 4개에 배정된 예가를 평균해 공사 예정가격을 산출한 뒤 투찰률(공사액 10억원 미만 87.745%, 10억~30억원 86.745%)을 곱한 낙찰 하한가를 산정한다.

낙찰 하한가와 가장 근접해 그 이상 투찰가를 입력한 입찰자가 최종 낙찰되는 방식이다.

기존 최저가 낙찰 제도는 성수대교 붕괴 등 사고 이후에 최적가 낙찰 제도로 바뀌었다.

◇ '수백~수천대 1'의 경쟁률…일부 업체가 독식한 이유

이러한 복잡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파견업체 직원들은 15개 추첨번호를 무작위가 아니라 정해진 순서대로 배정되도록 순열을 조정해 낙찰 선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주 이상 진행되는 입찰기간 업체들이 선택하는 추첨번호 4개도 실시간으로 파악해 낙찰 하한가를 예측했다.

직원들은 '예측 프로그램'뿐 아니라 외부에서 실시간으로 한전 서버에 접속할 수 있는 파일도 개발했다.

미리 알아낸 낙찰 하한가는 전기공사 업체로 넘어갔고 답을 알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업체들은 무난히 낙찰을 받았다.

범행은 10년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파견업체 직원 박모(40)씨와 업체 사이에서 모집책 역할을 한 전기공사 업자 주모(40)씨의 공모로 시작됐다.

박씨는 한전KDN과 계약이 만료돼 더 근무할 수 없게 되면 후임자를 물색해 수법을 전수해 범행을 이어 갔다.

범행은 갈수록 대담해져 초기 공사대금의 1%였던 커미션은 최근에는 10%까지 올랐다.

파견 직원 4명이 받은 뒷돈 총액은 모두 134억원. 체포 당시 금고에 4억1500만원을 보관하거나 사무실에 수백장의 현금 띠지를 모아둔 경우도 있었다.

가담자들은 고급 아파트, 외제차는 물론 오피스텔 35채를 보유하기도 했다.

업자들로서도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전기공사는 규모가 크고 마진율이 높으며 특정 공구의 단가공사를 낙찰 받으면 2년간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전단가 공사는 천정부지의 경쟁률을 기록해 최고 5763대 1인 공사도 있었다.

◇ 뇌물 비리에 이어 대규모 입찰 비리

검찰이 제보를 입수한 계기는 지난해 11월 수십억원대 광주·전남 배전단가 공사 입찰이었다.

300~1000대 1의 치열한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몇몇 업체가 공사를 독식하자 점차 불만이 새어 나왔다.

이러한 비리가 검찰의 귀에 흘러들어 가는 동안 과연 한전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동안 불법 행위를 몰랐을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자 앞으로 검찰 수사의 관건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설사 한전 측이 비리를 몰랐더라도 부실한 관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전은 입찰시스템 관리를 위해 한전KDN을 자회사로 설립해 유지·보수 업무를 위탁했고 한전KDN으로 파견된 업체 직원들은 아무 제한 없이 한전 입찰시스템에 접근, 조작할 수 있었다.

내부 조작은 외부인의 침투에 의한 범죄보다 훨씬 손쉽고 위험성이 큰데도 한전 측은 통제시스템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고 검찰은 지적했다.

더욱이 파견 직원 퇴사시 전임자의 추천만으로 후임자가 채용되는 관리상의 허점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한전 관계자는 "전산입찰 시스템 비위행위 의혹과 관련된 민원을 파악하고 지난해 11월 내부 점검과 감사를 진행하고 모두 26만건의 시스템을 점검, KDN 재위탁 업체 작업자의 작업내용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며 "즉시 광주지검에 수사를 의뢰하고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각종 개선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한전은 입찰 비리 외에도 나주지사 전·현 직원들이 업자들에게 월급을 받다시피 뇌물을 챙긴 사실도 적발됐다.

이와 관련 한전 직원 7명(구속 5명), 업자 6명(구속 4명)이 기소됐다.

이들이 범행한 수법이나 받은 돈의 규모도 놀랍지만 이렇게 입찰시스템을 조작한 범행이 10년간이나 저질러졌다는 사실에 업계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비리를 통제하고 적발하는 한전의 내부 체계가 얼마나 엉망이면 이런 일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한전이 자회사인 한전KDN에 맡겨 관리하는 전자입찰제도는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복잡하게 돼 있지만 이들에게는 소용없었다.

이들은 파견업체 직원이지만 한전 입찰시스템에 접근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특히 이들은 한전KDN 파견 근무가 끝날 무렵에는 후임자를 물색해 일하게 함으로써 범행을 이어갔을 정도다.

입찰시스템 조작 범행이 사람을 승계해가며 계속되는데도 한전은 이를 적발하지 못했다. 한전은 이날 보도 자료를 내고 "전산입찰 시스템 비위행위 의혹과 관련된 민원을 파악하고 지난해 11월 내부 점검과 감사를 진행하고 모두 26만건의 시스템을 점검, KDN 재위탁 업체 작업자의 작업내용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며 바로 검찰에 수사 의뢰하고 각종 개선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전이 어떤 설명을 내놓더라도 이번 범행의 수법이나 지속 기간 등을 생각하면 관리 부실의 책임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간 한전과 그 자회사의 비리 대부분은 납품이나 공사를 맡은 업체로부터 직원들이 뇌물을 받아 챙겼다 걸린 경우였다.

광주지검은 지난달에도 전기공사 업체로부터 마치 월급처럼 뇌물을 받은 혐의로 한전 나주지사 전·현 직원 7명을 기소하기도 했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한전은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처절하게 반성하고 비리 방지와 적발을 위한 내부 시스템을 확실하게 뜯어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일요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