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가난하게 살아온 ‘달동네 벽안의 신부님’ 안광훈(남․73세․본명 브레넌 로버트 존) 삼양주민연대 대표가 제26회 아산상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안광훈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가톨릭교회에 전한 첫 번째 메시지인 “교회는 가난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말을 평생 온몸으로 실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안 신부는 현재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서울북부실업자 사업단 강북지부(현 삼양주민연대)의 대표를 맡고 있다. 삼양주민연대는 IMF 외환위기 후유증이 심각했던 1999년 설립돼 지역맞춤형 일자리 창출, 가사 및 산모 도우미 사업단, 마을기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삼양주민연대에서 활동하면서 저소득주민들이 임대주택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솔뫼신용협동조합’ 설립에도 참여했고, 2009년에는 6천만원을 마련해 저소득주민의 병원비, 학자금, 전월세 등을 대출해주는 ‘한바가지’ 소액대출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폈다.


안 신부는 1941년 12월 14일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3남 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체신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빼고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집에는 매달 골롬반 회지가 배달됐는데, 어린 시절 그는 한국과 필리핀 선교 얘기가 나오는 이 회지를 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5년 호주 시드니의 골롬반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고, 다음해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왔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서울 돈암동에 자리한 골롬반 한국지부에서 2년, 삼척성당 주임신부로 1년 동안 보낸 후, 1969년 정선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그는 정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여러 활동을 했다. 특히, 고리대금과 사채피해로 고통 받는 정선 저소득주민을 위해 1972년 12월 정선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30명이 100원씩 출연해 3000원으로 설립된 정선신협은 현재 400억원이 넘는 규모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아픈 자식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신자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갔지만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아이를 목격하고 병원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했다. 그는 프란시스코 수녀회에 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시설 설립을 제안하여 1976년 프란치스코의원이 개원되었다.


프란치스코의원은 가난한 주민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했고, 순회진료와 보건교육 등을 통해 정선 주민들의 건강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안광훈 신부가 도시빈민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서울 목동성당 주임신부를 맡고나서부터다. 목동 신시가지 계획이 발표되고 성당 근처 안양천변에 살던 사람들이 용역깡패에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서 철거민들과 함께 반대 운동에 나섰다.


철거민들에게 목동성당 본당 건물을 빌려줬고, 철거민 대표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지 않도록 울타리가 되어줬다. 또 1984년에는 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 도와준 1천만원을 종잣돈으로 안양천변 철거민 100가구가 모여살 수 있는 마을을 경기도 시흥에 마련했다.


이후 그는 성신여대 입구 근처 ‘골롬반신학원’ 원장을 6년간 맡고, 미국으로 출국해 시카고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했다. 1992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도시빈민지역 주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하자, 추기경이 삼양동 지역을 추천해줘 삼양동에서 활동하다가 1998년 선교본당이 설립되면서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그는 재개발 철거지역에서 전셋집을 구해 혼자 숙식을 해결했다.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고, 도시 빈민 곁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개발바람이 불어 세 번이나 전셋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안 신부는 자신의 전셋집을 세입자 대책위원회 회의실로 제공하고, 세입자 권리보장과 임시거주지 마련을 정부에 요구하는 등 주민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힘썼다.


안광훈 신부는 “목동에서 처음 재개발 문제를 접했을 때 힘들었지만, 재개발지역 철거민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다”면서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도 철거촌에 전셋집을 얻어 살면서 지역주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1966년 낯선 한국 땅을 밟은 뒤 48년 동안 빈자를 위해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함께, 같이’의 가치를 믿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권리를 찾고 자립할 수 있게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산상 대상 수상 소식을 들은 안 신부는 “상 받을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받게 되어 부끄럽고 미안하다. 상금은 함께 일해 온 분들과 상의해서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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