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길을 묻다-아시아리스크모니터 노다니엘 대표>
"교육지상주의 철폐 없이는 한국 사회 선진화될 수 없다"

아시아리스크모니터 노다니엘 대표.

[일요경제=심아란 기자] 수출 중심으로 국가경제의 몸집을 불려오던 한국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에 잔뜩 긴장한 가운데 중국은 사드보복으로 한국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은 수년째 평행선을 달리고 있고 내수경제는 꽁꽁 얼어붙었다. 경제지표를 통해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위기의 심각성은 피부에 와 닿지 않으나 서민들은 당장 밥 한 끼를 사먹으면서도 지갑 열기가 두려운 게 현실이다.

30여년간 경제학자이자 컨설턴트로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직접 체험한 아시아리스크모니터의 노다니엘 대표이사는 지난 14일 <일요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를 진단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안을 제시했다.

노 대표는 한국에서 논의되는 ‘경제’라는 개념은 정부의 정책과 그에 영향을 받는 시장경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한다고 정의했다.

이는 한국 경제의 성공신화로 여겨지는 ‘한강의 기적’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했고 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주체들이 그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노 대표는 이를 학문적으로 보면 ‘정부-기업 관계론’의 영역이지만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보다 더 큰 차원의 ‘국가권력’과 ‘시민사회’의 갈등이라는 시각에서 생각해볼 것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통치의 위기’, ‘시민사회의 경제민주화 부재’, ‘엘리트사회’ 세 가지를 꼽았다.

<다음은 이하 노다니엘 대표와 일문일답.>

- ‘통치의 위기’란 무엇인가.

▲ 시민사회가 국가권력의 방침이나 정책에 반발해 공권력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한국보다 민주화를 먼저 이룬 유럽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시민의 반란, 미국에서 월남전 반대 등의 대규모 시위, 일본에서 있었던 미일동맹에 대한 시민의 반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진사회에서는 통치의 위기가 일시적이고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것이었다면, 한국에서의 통치의 위기는 ‘항상적’이고 ‘범사회적’이다. 이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란과 국가권력의 변동을 경험해 온 한민족에게 형성된 일종의 역사적 DNA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민심이 천심’이라거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등의 구호들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 11명의 대통령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감옥에도 가지 않고 온전하게 임기를 마치고 시민으로 돌아간 사람이 극소수이다.

- 한국의 공권력이 '통치'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 간단히 답변할 수 없는 큰 주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의 지도자가 정상적인 통치방법인 ‘설득’ (persuasion)을 바탕으로 정통성과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그 외의 수단, 즉 강압이나 카리스마, 거짓말 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통치의 위기'를 해결할 방안이 있다면.

▲ 최근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한국에 큰 혼란을 가지고 왔다. 이 농단(壟斷)이라는 말은 힘을 가진 자가 위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서양식으로 바꾼다면 private ordering(사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를 포함한 사회질서를 지키는 일체의 행위를 ordering이라고 한다면, 행정부를 포함하는 공권력의 질서유지행위는 legal ordering(법규명령)을 중심으로 하는 public ordering(공공질서를 확립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정치와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경제라는 두 영역 모두에서 사인(私人)들이 설치는 경우가 많다. 특정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정책을 좌우한다거나 특정한 이익집단이 사회의 어젠다를 정하는 행위는 모두 private ordering이라고 보고,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 '엘리트사회'란 개념을 정의한다면.

▲ 한국의 엘리트사회는 끊임없이 그 능력과 도덕성에 의심을 받아왔다. 다른 사회와 비교해 보면, 이 문제의 핵심은 엘리트의 형성과정에 있다. 최근 ‘수저론’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한국의 엘리트란 ‘개천에서 난 용’ 몇 퍼센트와 기득권 가정에서 나온 대부분의 용들로 구성된 용의 무리들이다.

특히 그 등용과정은 개인의 품격이나 창의성 등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오직 ‘암기력’을 테스트한다. 이 시험을 10대와 20대에 잘 치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엘리트가 된다. 이들은 대개 두 형태의 ‘등용문’을 통과한 부류다. 하나는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를 통과한 사람들과 (주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딴 자격증 면허증형이고, 또 하나는 돈이나 권력이 많은 부모 밑에 태어난 세습형이다. 이들은 대개 ‘하늘’을 의미하는 ‘SKY대학’에서 학부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

- 엘리트사회는 한국 경제에 어떤 식으로 제동을 거는가.

▲ 한국사회 지도층의 위기를 논할 때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결핍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현실을 논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한가하고 엉뚱한 표현이라고 본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한국에 노블레스는 없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암묵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한국의 엘리트사회가 작은 공동체이며, 따라서 동창생이나 지인 한 사람만 통하면 누구와도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의 엘리트사회는 형태나 속성에 있어 조선시대의 상층부 사대부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을 비평할 때 반드시 쓰는 단어는 ‘crony’로, 라틴어 어원이 시간을 의미하는 chrono여서, 이는 오랫동안 (대개는 부도덕하게) 혜택을 주고받는 관계를 의미한다.

특히 이들은 정권이 바뀔 때 대선주자들의 자문그룹에 들어가고, 그 중의 일부는 나중에 장관이나 대통령보좌관이나 관변단체의 책임자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청년기 이후에 내내 해 온 일은 책상에서 펜과 종이를 만져온 일이다. 이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기상이나 지혜가 없다고 일률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의 직업은 대개 자신의 출세나 소속하는 조직의 발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는 이유로 ‘기능인’이 갑자기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만든 경제학교과서를 읽고 가르치던 사람들이 국가의 경제가로 재무를 총괄하는 지위를 차지하는 현상은 한국에서는 늘 있는 일이지만,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기적적인 현상으로 이해될 것이다.

- 엘리트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형태는 어떠한가.

▲ 입증된 엘리트를 중시하는 경향은 경제에서 ‘집중’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거시적으로는 삼성, 현대 등의 소수재벌이 국민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미시적으로는 각 산업에서 소수의 기업에 집중되고, 시장에서는 분야별로 특정한 상품이나 브랜드가 독점 내지는 과점을 형성한다. 영미경제에서는 이러한 집중을 카르텔로 규정하고, 이를 다루는 반합동법(anti-trust law·트러스트 금지법)을 ‘경제헌법’으로 중시한다. 한국의 시민들은 경제의 ‘비민주화’를 비판하면서도 입증된 일등상품에 집중하고 새로운 기업이나 상품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시장집중의 소극적인 동참자가 되고 있다. 

- 엘리트사회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 공권력에서 사(私)가 공(公)을 압도하는 비정상적 사회발전을 주도해 온 것이 바로 엘리트그룹이다. 이 엘리트의 형성기반인 교육지상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선진’이라는 어휘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금도 대학교육을 ‘고등’(高等)교육이라고 일본식으로 표현하지만, 수많은 범죄, 특히 경제에 관한 특정범죄가중처벌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초등이나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 교육 개혁이 우선돼야 하는가.

▲ 자정이 가깝도록 버스들이 줄을 서서 학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그렇게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못하고, 한 인간으로서 미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의 고교졸업생보다 능력이나 원숙성에서 떨어진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의학박사들이 개인의원을 개설하면서, 커다란 간판에 출신대학의 이름을 형용사로 붙여야 환자가 더 올 것이라는 심리구조는, 구태여 해당하는 어휘를 사전에서 찾는다면 '위선'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위선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지배받는 사람들은 영원히 저항심을 품고 살거나, 자신의 자손들을 그 대열에 참여시키는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 시민사회는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나.

▲ 유럽 등지에서 깃발 아래 모여 관광을 하는 아시아 사람들은 (발생의 순서대로 보면) 일본인이거나 한국인이거나 중국인이다.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비교해보면 한국인들에게 두드러지는 면이 하나 있다. 외국의 많은 문물을 ‘우리’와 끊임없이 비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안하는데 얘들은 이렇게 하네’라는 비교의 관점에서 외국을 이해하고 즐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이다. 한자어를 공통으로 쓰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우리나라’라는 어휘를 거의 쓰지 않는 반면, 한국인은 ‘우리나라’에 깊은 심리적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서 이 심리를 애국심이라고 동일시하기도 한다. 한국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애국심을 암암리에 요구한다.

- 국민으로서 애국심을 요구받는 것을 문제로 보는 이유는.

▲ 한국사회는 욕망과 행동에 있어서도 동질성을 추구하게 한다. 외부에서 보면 한국은 매우 동질적인 사회이다. 한국인의 정서나 행동에서 비교적으로 두드러지는 현상은 육체적인, 즉 가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다. 가령 김치를 비롯한 한국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 골프를 비롯한 스포츠종목에서의 한국선수의 성취, 음악과 춤과 연기로 구성되는 ‘한류’에 대한 예찬, 세계최고인 인천국제공항에 대한 흐뭇함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대통령의 피부과 치료가 국민적인 논쟁의 대상인 되는 그 시간에 지하철 차량이 성형외과 광고로 도배된 것이 현실이다. 젊은 남성들은 수술을 해서라도 ‘식스팩’의 복근을 가지려고 하고, 나이 든 남성들은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검버섯을 병원에서 빼고 있다. 한편 가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음을 개탄하는 글이 있는데, 그 경우에도 ‘번역이 부실’해서 한국문학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해석을 덧붙인다.

- 한국 시민사회가 본질적인 위기에 빠져있어 보인다.

▲ 지적한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성의 거부’이다. 한국과 일본의 저녁시간을 비교해보면 선명하게 부각된다. 대부분의 한국도시의 저녁은 흥청망청하다. 수많은 음식점에서 사람들이 고기를 굽고, 젊으나 늙으나 소주를 ‘각1병’씩 마신다. 대화는 주로 정치이야기, 스포츠이야기, 연예인이야기이다. 가정에서는 뉴스가 끝난 후 수많은 드라마가 인간의 애증과 경쟁과 시기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그런 점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발생한다고 보는가.

▲ 이러한 풍조 속에서 한국인은 특정한 시류에 쉽게 “꽂혀서” 동조하고, 정치적인 좌절감 속에서 특정한 정서나 신념을 과도하게 스스로에게 강요하며, 격정과 분노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인 사안들에 대하여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단순화, 양분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보혁의 대립, 지역 간 대립, 세대 간 대립 등은 어쩌면 지성의 위기의 외형적 표출이라고 본다.

- 뾰족한 해법이 있나.

▲ 해결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렵고 무례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래도 한국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짧은 의견을 말한다면 한국사회는 ‘상승하는 기대의 혁명’ 속에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시민문화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가난을 벗어나고 선진의 가정과 선진의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이 한국의 경제기적을 만들었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아야 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제로섬(zero sum)의 사회는 영원히 후진의 사회로 머무를 것이다.   <길+>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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