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공공성과 금융소비자 보호에 초점을 맞춰 성과지표 전체를 새로 구성해야"

금융노조는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은행권 과당경쟁 근절을 위해 현행 KPI(Key Performance Indicator·핵심성과지표) 제도의 전면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금융노조는 "KPI 제도는 단기 실적 위주로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어 실적경쟁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금융소비자들은 불완전판매와 은행의 경쟁비용 전가에 따른 차별로 피해를 받으며 은행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불완전판매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게 노조 측 입장이다.

특히 KPI는 은행을 출혈 경쟁으로 내몰아 은행의 장기적 성장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금융노조는 “현행 KPI를 전면 폐지하고 금융공공성 및 금융소비자 보호 관련 평가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금융감독 및 은행 경영평가를 과당경쟁을 제한하고 금융소비자 후생을 높이는 방향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허권 금융노조 위원장은 “금융산업의 과당경쟁은 IMF 외환위기 이후 계속해서 강도가 높아지다가 이제는 오로지 수익만 추구하며 금융기관 본연의 공공성을 외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당경쟁은 금융소비자와 노동자, 은행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금융산업 만악의 근원”이라며 “은행은 단기 실적의 극대화를 강요하고, 노동자는 고객의 이익보다는 실적기준에 따른 영업을 위해 장시간노동에 내몰리고, 소비자는 원하지도 않는 금융상품에 가입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를 입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금융노조가 신한은행 등 8개 은행의 KPI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한 결과, 은행별 KPI는 최대 97개에 달했으며 목표 달성률도 적게는 140%, 최대 180%였다.

이에 금융노조는 “이는 KPI에 따라 목표 기준을 달성해도 최고 가점을 받는 게 아니라 기준의 1.8배를 달성해야 최고 가점이 부여된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영역별 KPI의 비중도 전체 KPI 중 평균 62.6%가 신규상품에 배정돼 있는 등 상품 판매에 극단적으로 편중돼 있다는 게 금융노조의 설명이다.

그 다음으로는 관리지표, 재무 순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이는 각각 11%와 10.8%로 상품판매와 격차가 컸으며 소비자보호(2.7%), 사회공헌(6%)의 비중은 매우 미미했다는 것.

이에 금융노조는 “금융공공성이나 금융소비자 보호가 상품 판매보다 훨씬 홀대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또한 각종 프로모션 등의 실적 압박도 컸다. 모든 은행들이 연중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본부, 지역본부, 심지어 각 부서별까지 이중·삼중의 프로모션이 직원들에게 할당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 금융노조가 은행 사업장 조합원 3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고객의 이익보다 은행의 KPI 실적 평가에 유리한 상품을 판매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87%로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것이다.

은행원들은 그 이유로 과도하게 부여된 목표(66%)와 은행 수익을 우선시하는 KPI 평가 제도(56%)를 꼽았다는 것.

특히 가족, 친구, 지인 등에게 상품을 강매한 적이 있다는 답변도 75%로 매우 높았으며 교차판매 달성을 위한 상품 쪼개기(49%), 본인 자금으로 상품 신규(일명 ‘자폭’, 40%)의 경험도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금융노조는 이러한 실적경쟁은 결국 극도의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은행원들은 은행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과도한 실적달성 경쟁’(65%)과 ‘장시간 노동’(11%)을 꼽았는데, 1일 평균 2시간 이상의 초과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은행원들은 노동강도 완화를 위한 개선 과제로 가장 먼저 KPI 제도 개선(37%)을 꼽았으며 캠페인·프로모션 억제(24%)와 인원충원(24%)도 필요하다고 답했다.

노조는 “과당경쟁은 은행의 장기적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반고객에 대한 역차별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앞서 2014년 인천공항 제1여객 터미널 입점은행 입찰의 경우 제1사업자로 선정된 H은행은 최소입찰금의 3.7배에 달하는 630억 원의 입찰금액으로 최종 선정됐다.

올해 5월 인천공항 제2여객 터미널 입점은행 입찰에서 1순위로 선정된 S은행도 최소입찰금의 3배가 넘는 매년 연 200억의 기여금을 내기로 하고 선정됐다.

올해 7월에는 경기도 한 대학병원의 은행 출장소 입찰에서 K은행이 기존 임대료의 2배가 넘는 연간 약 9억 원을 제시해 수십 년간 거래해온 J은행이 철수하기도 했다고 노조는 밝혔다.

문제는 이러한 과도한 출점 경쟁과 예금·대출상품 유치전 등으로 인한 비용이 일반 고객들의 피해로 전가된다는 점이다.

노조는 “부자 고객들에게는 우대금리를 적용하고 각종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등 사실상 ‘노마진’ 영업을 하면서 일반 서민 고객에게는 일반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업무 특성상 금융공공성을 지켜야 하는 은행의 불필요한 경쟁비용은 금융소비들이 누려야 할 후생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과당경쟁을 근절하기 위해 현행 방식의 KPI를 전면 폐지하고 금융공공성과 금융소비자 보호에 초점을 맞춰 성과지표 전체를 새롭게 짜야 한다”고 밝혔다.

노조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면 ▲세부 상품판매를 평가에서 제외해 평가항목 수를 대폭 감소 ▲금융공공성·소비자보호 항목과 중·장기 실적 비중을 확대 ▲평가항목별 목표달성 인정비율을 제한 ▲절대평가 방식으로 전환 ▲일체의 프로모션을 폐지 ▲단기실적 중심의 경영진 평가방식 개선 ▲경영진 과도한 성과급 지급 축소 ▲경영진에 대한 장기 평가 기준 마련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아울러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금리적용 적정 여부 점검 등 금융 감독 강화 ▲중소기업 대출 의무비율 강화 ▲사회공헌도 평가 확대 등 은행 경영평가 기준도 강화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반 고객 역차별을 막기 위한 개인·기업 신용등급 평가제도 개선도 주문했다.

한편 금융노조는 이러한 요구들을 올해 산별교섭에서 의제화해 사측의 동참을 적극 요구할 방침이다. 또한 금융당국 및 정부와 국회에도 관련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줄 것을 촉구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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