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각 정권의 중심에서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 안돼
9선 국회의원 거친 정치 원로, 박 전 대통령 '하야 안해' 말하기도

향년 92세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됐다.
향년 92세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됐다.

격변의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던 3김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로 지난 23일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열린다.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7일.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예리씨 1남1녀가 있다. 고인의 평소 뜻을 반영해 고향인 부여 선산 가족묘에 안장된다. 

김(JP) 전 총리는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이른바 ‘3김(金)’으로 불리며, 박정희 전 대통령, YS, DJ 등 정치적 거물 사이에서 항상 '2인자' 위치에서 각 정권의 탄생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김대중 정부에서 각각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정작 정치인의 최종 목표인 대통령은 '3김' 중 유일하게 하지 못해 '영원한 2인자'로 남았다.

1926년 충남 부여의 부유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를 나와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을 지내는 등 주로 참모직을 역임했다. 1961년 중령이던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에서 중심 인물로 참여했고 그 뒤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맡았다.

김 전 총리는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회담을 갖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지만 이후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야인’으로 보내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김 전 총리는 이후 7·8·9·10·13·14·15·16대에 걸쳐 총 9선을 지낸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하면서 정치권에 복귀했다.

공화당 총재였던 김 전 총리는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YS의 통일민주당과 함께 ‘3당 합당’을 선언했다. DJ는 당시 3당 합당을 ‘야합’이라고 규정하며 반대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 전 총리는 민자당 대표에 올랐다. 그러나 3당 합당 시 약속했던 의원내각제 추진은 요원했고, 김 전 총리는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총재로 취임했다.

또 1997년 대선에서는 DJ의 국민회의와 김 전 총리의 자민련은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이른바 ‘DJP 연합’이었다. DJ는 15대 대통령이 됐고,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국회의원 9선 정치인인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노렸다. 김 전 총리는 자민련의 비례대표 후보로 선거에 나섰지만 당선에 실패했다. 10선 도전에 실패한 김 전 총리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렇듯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영욕의 부침을 거듭했던 김 전 총리는 그야말로 ‘한국 정치사의 풍운아’가 아닐 수 없다.

24일 김 전 총리의 빈소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남동생인 박지만 이지(EG) 회장과 그의 부인 서향희 변호사가 찾아와 조문했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의 딸 박영옥 씨와 1951년 결혼해 현재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촌 형부이기도 하다.

최근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이 탄핵정국에 휩싸였을 때 ‘5000만 국민이 달려들어서 내려오라고 해도 절대 제발로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을 잘 아는 그의 말은 그대로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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