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적극 중재
타결 이뤘지만 9년간 노동자 등 30여명 세상 등져

최종식 쌍용자동차 사장이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경제사회노동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쌍용차 노사 해고자 복직 잠정 합의에서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왼쪽)의 손을 잡고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최종식 쌍용자동차 사장이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경제사회노동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쌍용차 노사 해고자 복직 잠정 합의에서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왼쪽)의 손을 잡고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사가 14일 해고 노동자 119명을 전원 복직시키기로 극적인 합의를 하면서 2009년 시작된 쌍용차 사태가 9년 만에 마무리 됐다.

대량 해고, 70여 일에 걸친 공장 점거 옥쇄파업, 노조위원장의 구속, 9년에 걸친 노조의 투쟁 등으로 한국 사회 노사갈등의 대표격 이었던 쌍용차 사태가 9년 만에 타결됐다.

쌍용차 사태의 발단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한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경영 악화를 겪고 있던 쌍용차에 금융위기는 큰 타격을 줬다. 당시 대주주였던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2009년 1월 쌍용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은 '회사의 회생을 위해 대규모 인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에 따라 쌍용차는 같은 해 4월 전체 임직원의 36%인 2600여 명을 정리해고하기로 결정했다.

노조원들은 이에 반발해, 그해 5월 21일 경기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이른바 '옥쇄파업(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 에 돌입했다.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투쟁했다.

파업은 77일이나 이어졌다. 그 와중에 1700여명이 명예퇴직 등으로 회사를 떠났다. 970여 명은 파업을 끝까지 버텨냈지만 그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무급휴직이냐', '명예퇴직이냐' 둘 중 하나였다.

454명이 무급휴직을 택했고, 나머지는 명예퇴직를 선택 자진해서 회사를 나갔다. 그러나 노조 집행부를 중심으로 한 165명은 무급휴직과 명예퇴직 양쪽 모두 선택하지 않아 결국 해고자가 됐다.

농성을 푸는 과정에서는 경찰은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강제해산 작전을 집행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민주노총 쌍용차지부장이었던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 조합원 64명이 구속됐고, 30여 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관도 100여 명 부상을 당했다. 경찰은 노조가 경찰 헬기와 장비를 파손하고 경찰관을 다치게 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쌍용차 노조를 상대로 16억9000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2015년 이 중 11억5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 상고심에 계류돼 있다.

쌍용차는 지난 2013년 경영이 다소 회복되자 가장 먼저 무급 휴직자 454명을 전원 복직시켰다.

2015년 쌍용차 노사는 신규 인력 채용 수요가 생길 때마다 해고자와 희망퇴직자, 그리고 신규 인력을 3:3:4의 비율로 채용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2016년 40명, 2017년 62명, 그리고 올해 16명의 해고자와 희망퇴직자가 쌍용차로 돌아갔다. 그러나 119명은 여전히 옛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 사이 해고자와 그 가족, 협력업체 노동자 등 30명이 자살 등으로 세상을 등졌다.

결국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고 쌍용차 사태는 '해고자 전원 복직'이라는 극적 합의를 통해 9년에 걸친 투쟁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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