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은 130여 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그것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60여 개 민족이 단시간에 집결되었다. 민족이 다르면 풍습과 종교가 다르기 마련이니 한 국가의 정체를 유지하려면 이들의 차이를 한 데 묶기 위한 노력이 절실해진다. 카자흐스탄은 그런 점에서 130여 개 민족을 하나의 국체로 모아낸 세계 최고의 구심력을 갖춘 국가다.


가톨릭, 러시아정교, 이슬람, 유대교는 이 나라의 유력한 4대 종교다. 부부와 가족과 친구와 선후배로 연결된 이들 종교의 공존 양상은 신앙을 절실히 갈구한 최초의 한 성자의 순정한 인간적 진실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대교 남편과 이슬람 부인, 러시아정교 아버지와 가톨릭 딸, 이슬람 남자 친구와 가톨릭 여자 친구들이 서로 공생하는 터전이 바로 카자흐스탄이다.


이들 종교의 사제이자 지도자들인 가톨릭 신부와 이슬람 이맘과 러시아정교 사제와 유대교 랍비는 서로 선후배이자 친구로 지내고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인부들이 모여 한번은 성당을 짓고 한번은 모스크를 짓는다. 심지어 불교 신자를 위한 사원을 짓기도 한다. 이만하면 내력이야 어떻든 카자흐스탄이야말로 종교 자유를 구현한 진정한 자유국가라 할 만하다.


우리의 경우에도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전래된 불교와 조선 중기에 우리 스스로의 에너지로 수용한 가톨릭과 조선 말기 선교사를 통해 전파된 개신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일부 선구적 사례로는 조만 국경 인근에서 자연스레 신자가 되거나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슬람교 교도를 위한 모스크도 서울에 있다. 헌법에도 명시된 바, 우리에게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보장하는 근본적 권리이기도 하다.


엊그제 광화문 근처에서 본 장면, 어깨띠와 홍보 문구를 검게 붉게 적은 조끼를 입은 채 한 손엔 확성기 한 손엔 전단지를 든 어느 개신교 신자. 그 사람의 간절한 구원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시민들은 신호가 바뀔 때마다 서로 엇갈려 바삐 지나갔고, 필자 역시 본 채 만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한두 번 본 장면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간절함을 받아주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므로, 종교적 메시지를 불특정 다수를 항해 협박조로 전파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주를 믿으라, 믿지 않으면 천국에 이를 수 없을지니.


한때 부산 동래 시외버스터미널 앞 육교 위에서 마주친 검은 복색들의 '딱~ 딱~' 나무 소리. 불규칙적으로 우편함에 꽂혀 있던 파수대.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백인들. 길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나 잠깐 시간을 내달라던 어느 여성들. 아, 종교 자유의 향유자들. 그들이 선택한 자유의 종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파하려는 선동가들. 이들의 인간적 순수성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어제오늘 겪은 것만은 아니다.


1937년엔 살인과 성폭력과 온갖 비인간적 폭력과 횡포로 점철된 백백교(白白敎) 사건이 있었다. 교주 전용해는 한마디로 악마였다. 예배 도중 누군가를 지목하면 그 사람은 쓰러져 죽었다. 물론 이미 죽인 뒤 시신만 앉혀 놓은 경우였다.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배신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재산을 다 바치지 않거나 동요의 움직임을 보이는 신도들은 모조리 죽였다. 여신도들은 그의 성적 노리개였고 거기서 태어난 자신의 핏줄들도 다 죽였다. 1941년에야 마무리된 재판에서 밝혀진 전용해의 살인기계 '벽력사'들의 범죄는 이렇다.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그들은 때려죽인 시체를 거적에 말아 자전거 뒤에 싣고 한강으로 가서 던져 버릴 만큼 살인에 둔감해져 있었다.


말세지간의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를 견디며 인내하며 그래도 저 길 끝에는 햇살이 비추리니,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 자유의 종교를 선동적으로 왜곡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 294명의 사망자와 10명의 실종자를 만든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제는 카자흐스탄과 우리나라의 종교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의 종교로 나아가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종교의 참다운 최초의 본질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은 구원에 선후가 있고, 먼저 구원된 내가 다른 누구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계몽적 선동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이다. 구원을 간절히 희망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맡겨두는 일이다.


필자 김재홍(金載弘) 시인은 2003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메히아'와 '다큐멘터리의 눈'을 발간했으며, 2011~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차세대예술인(AYAF)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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