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끈 주역이자 대통령 공로 커 IMF 시대 맞기도

▲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일요경제=신관식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새벽 지병으로 서거했다. 우연히도 이 날은 18년전인 1997년 재임시절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알리는 대국민 발표한 날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 시기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그의 궤적을 짚어보고자 한다.

대일 항쟁기에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저항했고, 이어진 신군부 독재에도 맞서는 등 '투사'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여는 데 공헌했다. 

유신 시절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며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을 드러내는 등 민주화 운동을 하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금융실명제 도입,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역사바로세우기 등 업적도 남겼지만, 재임 말기에는 아들 현철 씨가 연루된 비리로 얼룩졌고,1997년 외환위기로 IMF 시대를 맞았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만큼이나 그의 삶도 격동 그 자체였다.

▶ 민주투사에서 대통령까지

김 전 대통령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됐던 그때 나이 그는 만 25세의 나이였다.

이후 9선을 기록한 김 전 대통령은 역대 최다선에도 올랐다.

약관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당선되던 해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연임을 위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고, 7개월 만에 자유당을 탈당해 평생 반독재 투쟁이라는 험로를 걷게 된다. 이듬해인 1955년에는 윤보선, 신익희, 조병옥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한 것이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연장 반대집회 및 가두시위를 벌여 서대문 형무소에 23일간 구속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김 전 대통령은 만 37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원내총무에 오르고, 1969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상도동 자택 인근에서 초산테러를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같은 해 만 41세의 나이로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대선 지명대회에 출마하며 내세웠던 게 바로 '40대 기수론'이다.

그러나 1970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시며 평생 앙숙이자 라이벌 관계가 시작된다.

하지만 당시 YS는 경선에서 승리한 DJ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김대중 후보의 승리가 바로 나의 승리이고 국민의 승리"라고 전국을 돌며 지지운동을 하며 정치사에 명장면을 연출했다.

의원직 제명도 헌정사상 최초로 당했다.

1979년 제1야당의 당수로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란 민중혁명으로 미국이 물밑에서 지지하던 팔레비왕정 체제가 무너진 사태를 언급하며 한국 내에서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게 발단이 됐다.

야당이 본회의장을 막아서자 여당은 다른 곳으로 회의장을 옮겨 제명안을 처리했고, 그때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3년 5월 가택 연금된 김 전 대통령은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며 신군부에 온몸으로 대항했다.

최근에야 최장기 기록이 깨진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은 이후 두고두고 회자되며, 정치 역사를 바꾼 한 장면으로 남았다. 

이후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킨 김 전 대통령은 1985년에는 신한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투쟁을 전개하는 등 이른바 '87년 체제'를 탄생시키는 주역이 됐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출마한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돼 군부 정권의 종식에 실패했다.

▲ 격정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끌었던 3김, 왼쪽부터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 3당 합당, '호랑이굴' 들어가 대권 성취

1990년 1월 3당합당은 '승부사'라는 자신의 별명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으로서 청와대의 주인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자당을 창당했다.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으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을 결행했다.

이후 여소야대를 일순간 뒤집고 여당의 2인자로 변신에 성공했으며, 우여곡절을 거치며 2년 만인 92년 5월 민자당 후보로 선출돼 같은 해 대권까지 거머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이 꿈"이라던 거제 섬소년이 1954년 의회에 입성하고 나서 38년만에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 한 때 지지율 90%, 그러나 IMF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마자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개혁의 기치를 높게 들었다. 당시 하룻밤새 떨어진 별이 50개로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1995년에는 '12·12 및 5·18 특별수사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이와 함께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금융실명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추진했다. 1993년 8월 12일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를 발동, 당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 시행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은 집권 초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누리기도 했으나 정권의 인기를 의식한 깜짝 행보 식의 독단적인 정책과 부패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 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김현철 씨에 대한 첩보가 계속 보고됐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외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1996년 12월26일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국회 처리를 하면서 정권은 급격한 하락세를 걷게 된다.

급기야 1997년 12월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결국 정권교체의 빌미가 됐다. 그해 11월까지도 IMF의 심각성을 김 전 대통령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지지율은 사상 최저치인 8%를 기록, 지지율 최고와 최저치의 폭이 가장 큰 대통령이었다.

▲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장례 기간 26일까지 5일장으로 치뤄진다

▶ DJ 서거 직전 "화해했다고 봐도 좋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개진했다. 특히 대선 때마다 분명한 입장을 나타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총재에 대해 "대통령 시절 내가 감사원장과 총리에 임명한 인물이다. 한나라당이 승리하는 것이 자연의 도리"라며 지지를 선언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이인제 후보를 물밑 지원한다며 이 총재 측이 화형식까지 벌여 불편한 관계였으나 5년 후에는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는 당시 이명박 후보를 공개 지지해 당내 민주계가 대거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평생 숙적이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화해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상에 머무는 동안 이뤄졌다.

당시 신촌세브란스에서 사경을 헤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을 한 뒤 "화해했다고 봐도 좋다"고 밝힌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새벽에 조깅을 하며 강철 체력을 과시하던 김 전 대통령도 2013년 4월 폐렴으로 1년 6개월간 입원한 뒤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다 결국 2015년 11월 22일 서거, 역사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서로에게 '숙명'과도 같았던 '후광'(後廣) 김대중과 '거산'(巨山) 김영삼. 두 '거목'(巨木)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가면서 한국 현대사의 큰 한 페이지가 넘어가게 됐다.

한편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례명칭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으로, 장례 기간은 26일까지 5일장으로 정해졌다.

국가장법에 따라 장례위원회가 설치되며, 위원장은 관례대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는다.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다. 안장식은 영결식 종료 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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