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0시간 이상 일하고 폭행도, 운전기사 대부분 진술하기 꺼려


신분제가 엄격한 봉건사회에서 주종관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인 것처럼 현대사회에서의 주종관계도 이와 별반 다른게 없다.

올해 상반기에만 김만식 몽고식품 명예회장,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등이 운전기사에게 갑질하다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일부 '송곳의 끝'처럼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얼마 전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라는 발언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겠지만 오늘날에도 권력과 부(富)를 움켜쥔 자들의 의식은 예나 다를바 하나 없다는 방증이다. 

최근 가신(家臣)인 운전기사에 '갑(甲)질 매뉴얼' 논란을 일으켰던 정일선 현대BNG스틸 사장이 3년간 운전기사를 61명이나 갈아치운 사실이 드러나 또한번 참담함을 안겨주고 있다.

고용노동부 서울강남지청은 정 사장을 근로기준법을 위반 혐의로 조사한 결과 이같은 사실을 밝혀내고 지난 21일 기소 의견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고 27일 밝혔다.

정 사장은 최근 3년간 운전기사 61명을 주 56시간 이상 일하도록 하고, 이들 가운데 1명을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 사장 측은 "61명은 부사장이나 임원 등 다른 회사 직원의 차량을 모는 운전기사를 모두 합한 숫자"라며 "정 사장의 차량을 직전 운전한 운전기사는 12명으로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정일선 현대 비앤지스틸 사장

전직 수행기사 증언 중에는 매뉴얼을 어기면 "이 X끼야, 누가 니 맘대로 하래? X신 같은 X끼야, 니 머리가 좋은 줄 아냐? 머리가 안 되면 물어봐"라며 주먹으로 머리를 20~30대씩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가(家) 3세인 정 사장은 고(故) 정주영 회장의 넷째 아들인 고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장남이다.

정 사장은 A4용지 14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매뉴얼을 만들어 운전기사에게 제시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수시로 폭언과 폭행을 했다는 내용이 올해 4월 언론에 보도돼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정 사장은 모닝콜과 초인종 누르는 시기·방법 등 일과가 촘촘히 규정된 매뉴얼대로 운전기사가 이행하지 못하면 폭언과 폭행을 했고, 경위서까지 작성하게 했다.

한 전직 수행기사는 "챙겨야 할 물품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이리와 이 X끼, 병신 X끼 이런 것도 안 챙기냐? 그럼 운동 어떻게 해? X병신아'라며 정강이를 발로 찼다"라고 증언했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는 정 사장을 서울남부지검에 고발했다.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첩된 뒤 서울강남지청으로 내려갔다.

강남지청은 정 사장이 근무 중 운전기사를 폭행했다는 보도 내용을 토대로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지만, 폭행당했다는 진술은 1명에게서만 확보했다.

강남지청 관계자는 "운전기사들을 일일이 다 조사했는데 대부분 진술하기를 꺼렸다"고 전했다.

강남지청은 '갑질 매뉴얼'에 대해서도 조사했지만 처벌 조항이 없어 혐의에는 포함하지 못했다.

강남지청은 이달 14일 정 사장을 소환해 조사하고서, 관련 서류와 피해자 등의 진술을 토대로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 사장은 올해 4월 해당 논란이 불거진 직후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 사과했다. 정 사장은 당시 "저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은 분들께 깊이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관계된 분들을 찾아뵙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래도 바뀐 것은 있다.

세상에 그들의 갑질 행위가 조금 드러나면 대중을 의식한 듯 머리숙여 곧잘 사과를 한다는 것이다. 대중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대중이 있어야 그들은 갑질을 계속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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